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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포스트 코로나 공모전] 장려상 작품
작성자 : 김호관
장려상, 사회복지과 김진훈 학생의 에세이 작품입니다.


[나의 코로나 극복 이야기]

사회복지과/김진훈

이번 코로나는 나에게도 예외 없이 찾아왔다. 처음 시작은 병원 근무를 하는 작은딸 아이가 걸려 오는 바람에 시작이 되었다. 아무런 증상이 없어 걸린 줄 모르고 가족 식사를 했고 식사를 하고 온 날 저녁 딸이 목이 살짝 아픈 것 같다고 했지만 설마 감기겠지 하고는 감기약을 먹고 그렇게 넘어갔었다. 다음날 마침 쉬는 날이었던 딸아이가 이상한 느낌을 받고는 “엄마 나 보건소 갔다 올게.”라고 말하며 집을 나섰다. 혼자 나가는 걸 불안해하는 나에게 계속 상황보고 문자를 보내면서 안심시켰다. 하지만 집에서 결과를 기다리는 나는 그냥 같이 따라서 나서 걸 괜히 혼자 보냈나 하는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때가 2022년 2월 말쯤 한참 코로나 확산 시기여서 보건소 앞에는 코로나 PCR 검사를 받으러 온 사람들 줄이 엄청 길다고 했다. 오전에 갔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검사는 오후로 미뤄지고 오도 가도 못 하고 밖에서 4시간 이상 기다리며 집을 나설 때 보다 증상은 더 악화가 되고 있었다. 목이 아파서 나갔지만 기다리면서 두통을 동반한 오한으로 힘들다는 딸아이의 말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만 아픈 사람들을 추운 밖에 바람을 막아줄 대책 하나 없이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는 그 모든 상황에 화가 나고 실망스러운 감정이 앞섰으며, 아이와 함께 있어 주지 못하는 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렇게 긴 시간을 기다렸다 검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딸은 집안 식구들에게 옮길까 봐 자기 근처에 못 오게 하면서 그렇게 혼자 아픔을 견뎌내었다. 그래서 가족들은 코로나에 걸리지 않으려 집에서 마스크 쓰고 일회용 장갑을 사용하며 약국에서 사 온 소독용 에탄올로 작은딸 아이가 화장실 왔다 갔다 할 때마다 그 주변을 소독한다고 뿌리고 닦고 하며 초비상 상태로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큰 딸아이가 살짝 증상이 있는 것 같다며 자가키트 검사를 하였는데 다행히 음성이 나와서 안심이었다. 그 시기에 큰딸은 다른 지역 중학교 1년 기간제 선생님 뽑는데 합격을 하여서 3월 개학을 앞둔 상태였고. 개학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이어서 매일 하루 두 번은 자가키트 검사를 했고 다행히도 매번 음성으로 나와 안심하고 개학할 준비를 꼼꼼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개학 날 아침 혹시 모르니 출발하기 전에 한 번 더 검사한다고 했는데 이런, 전날 저녁에도 음성으로 나온 결과가 아침에는 양성으로 나온 것이다. 아주 미비하게 두 줄이…. 설마 아니기를 바라며 다시 한번 더 검사지에 적혀있는 절차를 따라서 신중하게 검사를 했다. 역시 희미하게 두 줄이 나왔다. 난처하고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하필 등교하는 첫날 이런 결과가 나와 너무 황당한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1년 기간제이지만 담임을 맡은 상황이라서 더욱더 난감했다. 학교 측에서도 난처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워낙에 코로나가 유행이어서 코로나에 걸렸다고 이상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하지 못했다는 자책을 안 할 수가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큰딸 아이는 자가 격리차 학교 주변에 얻어놓은 오피스텔로 떠났고 혼자서 코로나를 겪어 내고 있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혼자 아픔을 겪어 내고 있을 딸을 생각할 때면 어느 부모나 같은 마음이겠지만 코로나 걸려도 괜찮으니 같이 있고 싶고,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하지만 본인은 그러고 싶지 않을 걸 알기에 그저 매일 매일 통화하며 안부를 확인할 뿐이었다.

이렇게 코로나로 집안이 어지럽던 때에 나 또한 대학교에 입학하여 첫 수업을 기다리고 있던 시기였다. 늦은 나이에 무얼 할까 고민하고 있다가 캠퍼스 생활도 해보고 싶고 아이들이 다 성장해서 내 보살핌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에 돈도 벌고,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 아이들 돌보는 일을 예전부터 전문적으로 배워보고 싶단 마음이 있었던 걸 한번 살려보자는 생각에 먼저 부족한 학력을 검정고시로 채웠고, 자격이 주어져서 대학교 보육 관련 과에 원서를 써넣어 합격통보를 받아 1학년 개학하는 날이었다. 큰딸이 양성이 뜨는 걸 보고는 불안한 마음에 나도 바로 자가키트 검사를 했다. 역시나 나도 양성이 나왔다. 큰딸과 함께 전날 저녁에 검사했을 때는 음성으로 나왔었는데. 등교 첫날이어서 들뜬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이내 들뜬 기분은 가라앉고 걱정이 앞섰다. 어떻게 하지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건지 알지 못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어떻게 대처할지가 참 난감하였다. 일단 학과 조교에게 문의하였고 확진 증명서를 보내주면 된다고 하여 그렇게 학교 문제는 잘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집에 또 다른 문제가 남아있었다. 남편. 우리 집 대장이 아직 걸리지 않았기에 퇴근하는 남편을 보며 나도 걸렸으니 당신도 해봅시다 하고 검사를 하였고 다행히 남편은 음성이 나왔다. 남편의 직장이 식품 관련 회사이어서 작은딸이 걸렸을 때부터 남편도 같이 자가 격리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남편 직장에 피해를 줄까 봐. 제일 신경 쓰고 관리를 했기에 그나마 그때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잘 넘어갈 수 있었다. 걸린 건 우리인데 정작 안 걸린 남편이 꽤 오랜 날 격리를 당했다. 남편은 코로나가 걸리지는 않아 다행이었지만 온 가족이 모두 걸렸기에 걱정되는 그 마음이 어떨지 짐작이 갔다. 일하랴 가족 돌보느라 본인 식사와 아픈 가족들 챙기랴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힘든 내색 없이 잘 버텨준 남편에게 정말 고마웠다.

작은딸은 격리를 마치고 출근은 하지만 후유증을 심하게 알았다. 계속되는 기침과 말할 때마다 쉰 목소리가 나와 환자들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을 토로하고 몸살 같은 통증은 한 달가량 지속 되었다. 병원 약을 먹어가며 일을 하다 보니 나른함도 일을 하는 내내 힘들게 한다고 울상이었다. 큰딸은 타지에서 혼자 코로나와 싸우고 있고 작은딸은 후유증으로 힘들어하고 내가 아픈 건 느낄 새가 없어 어쩌면 다행이기도 했다. 나는 3일 정도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두통과 몸살 같은 증상으로 제대로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하고 앓았다. 3일이 지나고 4일째 될 즈음 머리 아픈 건 좀 좋아졌고 몸에 통증도 잦아들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렇게 코로나가 휘몰아치고 지나간 뒤 우리 가족은 개인위생뿐 아니라 서로의 위생에도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외출은 꼭 필요하지 않으면 자제하고 약속도 잡지 않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몸에 좋다고 하는 것은 이것저것 실천해 가며 하루빨리 이 어려운 시기가 지나가길 바라고 바라며 지내왔다.

어느덧 봄, 여름, 가을이 지나가고 있고 지금은 실내 말고 실외에서는 마스크를 벗을 만큼 코로나가 약화 되었다. 그러나 당분간은 실내에서 마스크 벗어도 된다는 방역지침이 나온다 해도 마스크를 못 벗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나 그럴 것 같다. 특히 코로나를 심하게 알고 난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이번 코로나가 많은 걸 가진 사람과. 못 가진 사람. 어린아이, 젊은 사람, 나이 든 사람,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면서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된 것 같다. 지금껏 삶에 목적이 돈인 것처럼 경제 활동에 몰두했다면 코로나 덕에 삶에 목적은 즐거움과 행복을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사랑하는 이들을 보고, 만지고,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하는 평범한 일상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게 했다. 나와 더불어 우리 가족도 모두 건강함에 감사하며 행복이란 늘 겸손한 태도로 서로 화목하게 사는 가운데 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준, 어쩌면 평범하게 사는 일상이 제일 축복이고 행복이란 걸 느끼게 해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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